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
정호승 시집
아버지의 죽음에는 삽이 필요하다
줄담배를 피우며 비오는 날마다
흙이 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
저 곤고한 아버지의 삽질을 위해
삽으로 파묻는 죽음의 따스한 손길을 위해
삽, 중에서
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
미움이 끝난 뒤에도 다시 나를 미워한 것은 잘못이었다
눈은 그쳤다가 눈물버섯처럼 또 내리고
나는 또다시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린다
첫 눈, 중에서
뿌리에 흐르는 빗소리가 되어
절벽 위에 부는 바람이 되어
나 자신의 적인 나 자신을
나 자신위 증오인 나 자신을
용서하고 싶다
늙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, 중에서
사람들은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을 모른다
사랑이 다 끝난 뒤에도 끝난 줄을 모른다
창 밖에 내리던 누더기눈도
내리다 지치면 숨을 죽이고
새들도 지치면 돌아갈 줄 아는데
사람들은 누더기거 되어서도 돌아갈 줄 모른다
모른다, 중에서
97년 출간된 시집을 읽던 고3 여학생의 시선이
시집 중간중간 머문다
시는 새가 되어
눈이 되어
흙이 되어
가슴에 앉는다
아마도 마흔이 넘었을 그 소녀
자유롭게 하늘을 날길 바래본다
눈이 녹아 흐르는 물이 되어있길 바래본다
흙을 먹고 자라
제법 단단한 나무가 되어 있길 바래본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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